[Why] 문화재에 미쳤다, 나 홀로 방송국 10년 


- 조선일보 박돈규 기자

'문화재방송 한국' 김종문 대표

 

 

 

1인 방송국 ‘문화재방송 한국’을 10년간 운영해온 김종문씨가 그동안 사용한 카메라들 뒤에 서 있다.
“문화재에 미친 노인이지만 말년을 보람 있게 산다는 자부심이 있다”고 말했다. / 김지호 기자

 

기획부터 취재. 촬영, 편집, 내레이션까지 전부 혼자 한다.
김종문(80)씨는 걸어 다니는 1인 방송국이다.
문화재만 다루는 '문화재방송 한국'(www.tntv.kr)의 사장 겸 직원.
일흔 살이던 2008년부터 이 일을 10년간 해왔다.
그는 자신을 '문화재에 미친 노인'이라고 소개했다.
 

"문화재에는 민족의 얼과 혼이 스며 있잖아요. 세계화와 다문화에 떠밀려 우리 문화의 뿌리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2007년 말 남인천방송국에서 은퇴하기 전부터 1인 방송을 구상했어요."
 

명함엔 '영상기자(VJ) 김종문'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퇴직금으로 카메라를 비롯한 방송 장비와 녹음실부터 마련했다.
문화재 현장을 누비며 '유네스코 무형유산 영산재' '익살과 해학이 넘치는 봉산탈춤'
'줄타기 명인 김대균' 등  25분 분량의 동영상 200여 편을 만들었다.
공중파나 실버TV, 복지TV 같은 케이블 방송국에 이 프로그램을 판매한다.
홈페이지에 올린 자료는 무료로 퍼갈 수 있다.
팔순의 VJ는 "보존 가치가 있는 옛것을 지키고 알리는 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지난달 29일 인천 월미도에서 그를 만났다.
 

1인 방송국은 절간처럼 고요했다.
한 명 들어가면 꽉 차는 녹음실 앞에 카메라와 삼각대가 여럿 놓여 있었다.
"아날로그 시대부터 디지털 시대까지 그동안 나를 도와준 자식들"이라고 그는 말했다.

 

― 1인 5역을 하십니다.

"녹음이 가장 힘들어요. 한여름에 비좁은 녹음실에 들어가 내레이션을 할 때면
숨이 막히고 땀범벅이 돼요. 목소리가 늘 맑은 것도 아녜요.
날씨처럼 오락가락하죠. 컴퓨터와 씨름해야 하는 편집도 어려워요."


―이 일을 10년 한 감회라면.

"2009년에 강화도에서 신미양요(1871년)를 재현하는 행사가 있었어요.
촬영 갔다가 비탈길에서 넘어졌는데 삼각대가 척추를 치는 바람에 허리를 다쳤습니다.
그 후론 촬영하려면 진통제를 먹어야 해요.
그래도 이 나이에 몰두할 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맙지요."


―이만큼 오기까지 과정이 궁금합니다.

"전주KBS에서 기자와 앵커로 일하다 1989년부터 미국·일본으로 

'뉴미디어' 연수를 3년 다녀왔어요. 우리나라가 지방자치제 실시를 앞둔 때였지요.
미국의 1인 미디어와 일본의 지역 케이블TV에 매료됐습니다.
쉽게 말해 비디오 저널리즘인데, 배우면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었지요."


―은퇴 전 어떻게 준비했나요?

"제가 마지막엔 남인천방송국 부사장을 지냈어요.
이북에서 내려온 문화재는 대부분 인천에 주저앉았습니다.
1인 제작 시스템을 써먹고 싶어 안달이 났지요.
직접 캠코더 메고 현장으로 달려가 '인천의 숨결'이라는 20분짜리
문화재 프로그램을 만들었어요. 격주로 3년을 했습니다."
 

―고령에 몸도 불편하신데 방송국을 어떻게 꾸려가나요.

"가벼운 장비를 쓰고 한 달에 두 편 정도 제작해요.
지금은 강릉 단오제 영상을 편집 중이에요.
그런 프로그램을 방송국에 판매하면 1분당 4만원을 받아요.
그 수입으론 어림없지요. 연금 생활자라고 보시면 됩니다.
지방 갈 땐 30% 할인받는 무궁화호 기차를 타요(웃음)."


―현장에서 애로 사항도 있을 텐데요.

"최소 한 시간, 길게는 네 시간쯤 촬영해요.
서해안 풍어제는 꼬박 이틀 걸리고요.
장시간 촬영할 땐 생리 현상을 참아야 해 괴롭습니다."


―보람도 있겠지요.

"문화재를 촬영하면 출연자들과 막걸리를 한 잔씩 하고 금방 친구가 돼요.
그렇게 제작한 영상이 선정돼 방송될 때 보람을 느낍니다.
출연자들이 '잘 봤다'고 연락해오면 기분이 더 좋아요.
'방송 불가 판정' 받을 땐 울고 싶고요."

그는 가족을 떠나온 지 10년이 넘었다고 고백했다.
"집과 땅을 아내에게 증여하고 나오면서 자식들에게 '아버지는 오늘로 죽었다. 찾지 마라' 했다"며
"그렇게 미치지 않고는 이 일에 전념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난 10년간 집에 안 들어갔다고요?

"네. 2014년 전주에 국립무형유산원이 문을 열었어요.
집이 바로 근처에 있는데 눈에 띌까 봐, 붙잡힐까 봐 못 갔죠.
'축 문화융성'이라고 쓴 화환만 보냈습니다."
 

―아무리 문화재가 좋아도 그렇지, 이해가 안 됩니다.

"출가(出家)하는 심정으로 나왔는데 제가 나쁜 놈이죠.
저라고 왜 손주들이 보고 싶지 않겠어요. 가족도 친구도 버렸지만 후회하진 않습니다.
어떤 이익을 바라고 하는 일은 아니잖아요. 이것만 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요."
 

―우리 문화재 분야의 문제점을 짚어주신다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상스러운 이야기가 나오는 무형문화재가 여럿 있어요.
해학과 풍자를 넘어 외설과 욕설, 인신매매가 난무하죠. 조상을 욕되게 하는 일 아닙니까.
탈놀이 중에 다른 지역엔 없는데 경상도 오광대에만 '문둥이'가 등장하는 것도 이상하고요."


―원형 보존의 필요성도 있을 텐데요.

"원형은 원형대로 보존하되 공연하거나 교육할 땐 용어를 순화시키는 방법도 고민해야지요."
 

―가장 자랑스러운 문화재는 무엇인가요?

"강릉관노가면극이에요. 연기자가 모두 관노(官奴)였지요.
한국의 가면극 중 유일한 무언극이고, 춤과 몸 짓으로만 놀이를 구성합니다.
볼 때마다 눈물이 날 만큼 감동을 받아요."


―남은 목표라면.

"조선시대에 지은 돈대(墩臺)가 강화도에 54개 있는데 허물어진 채 방치된 게 많아요.
민통선 안에 있는 돈대까지 국방부 협조받아 촬영할 생각입니다.
복원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해야 한다는 방송을 하고 싶어요.
재미없으면 이 일 못해요. 몸이 허락하는 한 합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6/08/20180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