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동은 날마다 밤마다

떠났다간 돌아오고

돌아왔다간 떠나는

나의 터미널……

 

 

 

조병화 시인이 1981년 발표한 연작시連作詩 ‘혜화동 풍경’의 한 구절입니다. 이 시구詩句와 같이 혜화동은 사람들이 떠났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터미널과 같습니다. 성곽 마을인 명륜·혜화권역에 위치한 혜화동은 먼 과거에는 성균관 유생들이 모여 살던 반촌을 중심으로, 가까운 과거인 근현대 문화 형성기에는 학원과 대학을 중심으로 한 청년 문화의 발원지였습니다. 그리고 혜화동이 품은 이러한 장소성은 고스란히 오늘날로 이어져 문학과 미술, 음악, 연극에 이르는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자리하게 했습니다.

 

 

 

JCC미술관은 2016년 첫 전시로 우리 동네, 혜화동에 대해 생각해보는 <혜화동풍경惠化洞風景>전을 개최합니다. ‘무엇이 이 작은 동네를 유구한 시간 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게 했을까요?’ <혜화동풍경>전은 이 질문에 대한 실마리로 채워져 있습니다. 골목길을 재현한 전시장에서는 혜화동, 그중에서도 로터리를 중심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예술가들과 지금의 혜화동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혜화동에 관한 많은 시詩와 에피소드를 남긴 시인 조병화와 한국인의 정체성과 역사의식을 치밀하게 담아낸 소설가 한무숙, 명륜동 자택인 관어당과 동양서림을 오갔을 화가 장욱진, 70년 넘는 세월을 혜화동의 터줏대감으로 살았던 화가 이대원 그리고 혜화동에 살고 있는 우리 이웃들의 모습을 통해, 혜화동이 품은 문화예술의 향취를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이정표

 

 

매일 아침 그 자리, 혜화동 로터리

 

 

 

혜화동 로터리는 날마다 분주합니다. 혜화로, 창경궁로, 대학로 그리고 동소문로가 만나는 이곳 로터리에서는 큰 도로를 따라 들어온 차량들이 교통도交通島를 중심으로 분주하게 한 방향을 향해 움직입니다. 동서남북… 흘러들어온 방향과는 무관하게 로터리의 차량들은 모두 같은 방향으로만 돌다가 각자의 목적지에 맞는 출구를 찾아서 빠져나갑니다. 한때는 전차가, 또 한때는 분수가 놓이고 그 위를 고가高架가 지나가던 혜화동 로터리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표정이었지만 사람들이 들고나는 모습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매일 아침 그 자리, 혜화동 로터리에는 많은 사람이 일상을 시작하기 위해 이곳을 떠나기도 하고 들어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시간을 거슬러 생각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곳을 오갔을까요? 돌고 도는 혜화동 로터리는 마치 타임머신과 같습니다.

 

 

혜화동 로터리를 시작으로 ‘혜화동 풍경’ 속으로 산책을 떠나볼까요?

 

 

 

 

두 번째 이정표

 

 

하늘의 주소: 조병화, 한무숙

 

 

 

혜화동 풍경의 두 번째 이정표에 도착하면 시인 조병화와 소설가 한무숙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늘의 주소, 혜화동 107번지에 50여 년을 살았던 조병화는 혜화동에 관한 많은 시詩와 에피소드를 남겼습니다. 매일 아침 8시 15분, 로터리에서 통근 버스를 타고 혜화동을 떠난 시인은 늦은 시간 술이 거나하게 취해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합니다. 그리고 밤 12시, 로터리에 위치한 시인의 집 현관문은 통금 시간에 갇힌 많은 예술가의 두드림으로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밤을 새우는 예술가들의 흥취는 로터리에서 조금 들어간 곳에 위치한 고즈넉한 한옥으로 이어집니다. 소설가 한무숙의 집입니다. 명륜동1가 33-100번지에 살았던 한무숙은 1953년부터 40년을 이곳에서 살았습니다. 네모난 하늘을 받쳐 든 한무숙의 집은 고향을 떠나 고학하던 많은 문학청년이 찾아와 숙식을 해결하던 문단의 사랑방 같은 곳이었습니다. ‘생활은 평범하게, 사고는 비범하게’라는 신념으로 가정생활에 충실하면서도 예술가들과 교류를 마다하지 않았던 한무숙은 이곳에서 한국인의 정체성과 역사의식을 담은 많은 소설을 남깁니다.

 

 

 

 

세 번째 이정표

 

 

공동탕共同湯: 혜화동에서 만난 사람들

 

 

 

지금의 혜화초등학교 맞은편에는 대중목욕탕이 있었습니다. 조병화의 표현대로, 동네 사람들의 공동탕共同湯이었던 이곳은 어느덧 세월의 흐름에 따라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혜화동 사람들이 몸을 담그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을 공동탕은 없어졌지만 이곳 세 번째 이정표에 오면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 우리의 이웃, 혜화동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화가 장욱진의 부인인 이순경 여사가 운영하던 동양서림은 주인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건재합니다. 호떡집에서 시작해 중국음식점으로 3대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금문金門은 로터리의 또 다른 명소임을 자처합니다. 또한 혜화동 우체국을 끼고 걸어 들어가면 나오는 문화이용원의 이발사 할아버지는 60년 넘게 혜화동 사람들의 머리를 다듬어주고 있습니다. 창작 연극의 산실인 혜화동 1번지와 연우소극장 앞은 연극인들의 실험 정신으로 활기가 넘칩니다. 1968년 문을 연 혜화초등학교 근처의 보성문구사는 예나 지금이나 학생들로 북적입니다. 로터리 주변의 파출소와 유서 깊은 혜화성당 그리고 근현대 정치사의 한 획을 그은 장면 가옥은 혜화동의 유구한 역사를 대변합니다. 그리고 발랄하게 오가는 인근의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지금의 혜화동을 살아 숨 쉬게 하는 또 하나의 역사입니다.

 

 

 

 

네 번째 이정표

 

 

시간의 숙소宿所: 장욱진, 이대원

 

 

 

명륜동2가 22-2번지, 두 팔을 벌리면 닿을 듯한 좁은 골목길에 유일한 이층집이 있었습니다. 장난감처럼 작은 이층집에는 그보다 더 작은 창문이 있고요. 그 창을 들여다보면 구부정한 등을 하고 그림을 그리는 화가 장욱진을 볼 수 있습니다. 하꼬방 같은 화실에 화가가 없다면 혜화동 로터리 주변을 둘러보세요. 술에 얼큰하게 취해 고개를 숙이고 가는 깡마른 준노인을 만난다면 그가 바로 장욱진입니다. 혜화파출소에서도 선생만은 예사로 봐줄 정도로 유명한 애주가였지만 그림을 그릴 때는 몇 날 며칠 식음을 전폐하며 작업하던 열정의 천재 화가였습니다. 장욱진의 화실이었던 명륜동 관어당觀魚堂은 세상의 변화 속으로 사라졌지만 관어당이 남긴 예술은 영원할 것입니다.

 

 

화가 이대원의 아틀리에는 혜화동 15-50번지에 있었습니다. 파주에서 살다가 열다섯 살이 되던 1935년 혜화동으로 이사 온 화가는 2005년 작고할 때까지 무려 70년을 혜화동와 파주를 오가며 지냈습니다. 중학생 때 이사 온 집에서 대학생이 되고, 가장이 되고, 화가가 되고, 할아버지가 된 이대원은 70년 넘는 혜화동살이를 엮어 「혜화동 70년」이란 책을 출간했습니다. 한 화가가 자라고 결혼하고 생을 마감한 이곳 혜화동은 그의 삶과 예술이 그대로 숨 쉬는 곳입니다.

 

 

 

JCC미술관 특별기획전 <혜화동풍경>은 ‘매일 아침 그 자리, 혜화동 로터리’에서 출발하는 타임머신을 타고 시인 조병화와 소설가 한무숙의 ‘하늘의 주소’를 거쳐, 지금의 혜화동을 살고 있는 우리 이웃들을 만나는 ‘공동탕’ 지나 다시 장욱진, 이대원 두 화가가 머물던 ‘시간의 숙소’를 다녀오는 짧고도 긴 여행입니다. 혜화동은 광복 전후 문학과 미술, 음악, 연극 등 다양한 문화예술인이 오가던 곳으로, 근현대 문화 형성기에 많은 에피소드를 남기고 예술혼을 다지던 장소입니다. 이러한 혜화동 길, 그중에서 로터리를 중심으로 생활하던 조병화, 한무숙, 장욱진, 이대원과 같은 한 세대 위 예술가들의 작품과 자료는 혜화동 곳곳에 숨어 있는 문화예술의 정취를 전합니다. 더불어 당대를 살고 있는 혜화동 이웃들의 잔잔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우리 각자의 동네가 품은 오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는 것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