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국립현대미술관 기획전 «백남준 효과»는 백남준이 국립현대미술관과 함께 기획하였던 역사적인 전시 «백남준·비디오때·비디오땅»(1992),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1993)의 주요 주제들을 통하여 1990년대 한국 미술의 상황을 새롭게 살펴보는 전시이다.

 

1984년 30여 년 만의 귀국 후 백남준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걸쳐 한국과 세계를 잇는 문화 기획자이자 문화 번역자로서 전략적인 행보를 펼쳤다. 특히 백남준은 1986년 제10회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 1993년 대전 엑스포가 열렸던 한국의 시대적인 상황을 이용하여 정·재계를 넘나드는 전방위의 활동을 펼쳤다. 전시와 행사, 상업 광고를 기획하고,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연결해 1995년 광주 비엔날레 출범 및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설립이라는 눈부신 성과를 거두며 백남준은 미술계를 넘어선 전 국민의 스타로 떠올랐다. 일찍이 볼 수 없던 글로벌한 활동 영역을 바탕으로 비디오라는 새로운 형식 및 장르를 도입하고, 세계 속의 한국을 강조하며 한국적인 정체성을 국내외적으로 새롭게 발굴하고자 하였던 그의 노력은 세계화, 근대화, 과학기술의 발전과 함께 포스트모더니즘과 후기 신민주의의 바람을 타던 1990년대 한국 미술계 전체를 관통하여 동시대 미술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백남준·비디오때·비디오땅»(1992),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1993)은 현대미술 전시로는 국내 최초로 십만 명이 넘는 관람객을 불러 모은 블록버스터 전시였다. 두 전시 모두 동시대 미술의 주요 키워드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특히 정체성 논의와 매체의 확장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1990년대 한국 시각문화의 정체성은 빠른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국제 사회에 진입하며, 중진국으로 발돋움하던 한국의 국제화, 세계화 바람과 맞물려 있었다. 정치, 경제, 문화를 국제 사회의 기준과 나란히 견주고자 하는 과정에서 한국을 넘어서서 바깥 세상을 보고자 하는 범국가적 열망은 더욱 커져갔다. 더불어 과학기술의 발전과 정보통신혁명이 불러온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은 세기말 한국 사회에 등장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문화 담론이 미술계의 새로운 경향으로 이어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디오와 컴퓨터, 키네틱한 기계들, 복사 기술 등 과학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예술 매체의 확장은 기존 예술 매체가 실험하던 영역을 넘어서서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는 제3의 공간을 만들었다. 제3의 공간은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1993)에 중요한 영감을 주었던 이론가 호미 K. 바바(Homi K. Bhabha)가 발전시킨 개념으로 정체성은 항상 변화하는 혼종의 과정을 겪고 있고, 둘 이상의 정체성이 섞여서 혼성이 일어났을 때 이쪽도 저쪽도 아닌 제3의 새로운 영역이 생겨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1990년대 한국 미술에서 제3의 공간은 세계와 한국이 만나며 새롭게 생겨난 대안적 정체성의 영역이자, 과학기술과 예술, 자본이 의도적으로 혹은 우발적으로 만나며 생성해 낸 공간이었고, 고급 예술과 대중 문화의 중간지대, 혼합 매체와 설치의 공간으로 작동하였다. 회화, 조각, 판화 등의 서로 다른 장르는 각각의 매체적 특성을 확장하며 혼합 매체(Mixed media)의 영역을 탐험하였고, 같은 시기 미술계 스타인 백남준이 주도한 비디오 설치 또한 이러한 움직임을 미술계 전면에 등장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장르 해체와 세계화의 바람 속에 급격히 변해가는 사회에서 절대적이고 불변하던 가치들은 모두 섞여 상대적이고 덧없이 변하는 것들로 바뀌어 갔다. 작가들은 한국 사회의 경계의 바깥, 혹은 경계를 탐색하며 총체성 대신 분석과 분열이 불러오는 다양성의 공존을 항해 나아갔다. 같음 뿐만 아니라 다름을 통한 정체성 찾기가 시작된 한국 사회에서 보편적이고 천편일률적인 기준 대신 혼성과 혼용이 불러온 다층적인 시각은 중요한 가치로 떠올랐고, 미술계는 하위문화와 대중문화를 거리낌 없이 차용하며 시각예술의 주관적 해석의 여지를 무한히 늘려갔다.